문화토픽

조성진, 180분의 마라톤 무대 성황리에 마쳐

작성 : 2025.06.16. 오후 04:13
 지난 6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곡 전곡을 연주하는 특별한 독주회를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라벨 탄생 150주년과 조성진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무대였으며, 총 180분에 걸쳐 라벨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연대기 순으로 연주하는 대서사시 같은 공연이었다. 한 편의 음악 마라톤에 비견될 만큼 난도가 높고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 프로그램은 연주자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 작곡가로, 그의 피아노곡들은 세밀한 터치와 풍부한 음향 표현, 복잡한 리듬 구조, 그리고 극도의 감성 표현을 요구한다. 조성진은 이번 공연에서 ‘세레나데 그로테스크’로 문을 열었다. 이 곡은 불협화음과 거친 음의 조합이 특징인데, 조성진은 피아노 건반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음의 무게와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 라벨의 독특한 음향 세계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이후 이어진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에서는 우아한 터치와 탄력 있는 리듬으로 곡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그다음 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연주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지거나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엄격히 균형을 유지했다. 조성진은 마치 수채화 한 폭을 그리듯, 음과 음 사이의 공기마저도 끌어안으며 곡의 미묘한 감정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이어진 ‘물의 유희’에서는 수면 위를 흐르는 빛과 파동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소리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이 곡은 각 연주자마다 물의 표정을 달리 해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성진은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느낌보다는 규칙적인 패턴 속에서 일렁이는 물결을 그려냈다. 음악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연주는 청중으로 하여금 물 위를 걷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공연의 중반부에는 라벨 피아노곡 중에서도 난이도와 예술적 깊이가 뛰어난 ‘거울’이 자리했다. 특히 ‘바다의 조각배’ 세 번째 악장은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 복잡한 리듬과 섬세한 터치가 요구되는 이 곡에서 조성진은 무대 위의 무용수처럼 건반 위를 경쾌하게 움직이며 아름답고 섬세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그의 연주는 곡의 다층적인 감정과 환상적인 이미지를 완벽히 드러냈고, 관객들은 숨죽이며 그의 손끝에 집중했다.

 

 

 

조성진은 공연 중간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했고, 이어서 피아노곡 중 가장 난해하고도 유명한 ‘밤의 가스파르’를 연주했다.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 밀리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가 지나치게 어려워서 피아니스트 스크랴빈이 손을 다쳤다는 일화에 자극받아 라벨이 작곡한 곡이다. ‘밤의 가스파르’는 극도의 난이도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어 ‘피아니스트 철인 3종 경기’로 불린다. 조성진은 첫 악장 ‘온딘’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떠올리게 하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만들어내며 곡에 몰입했다. 이어 ‘교수대’에서는 오른손으로 신중하게 울리는 종소리 같은 음향으로 어둡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완벽히 연출했다. 이 악장은 라벨의 숨겨진 메시지와 해답을 찾는 듯한 신중한 터치가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악장인 ‘밤의 가스파르’는 격렬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요정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조성진은 그 모든 감정을 쏟아내 듯한 연주로 객석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은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로 시작됐다. 이 곡은 이전 곡들보다 가벼운 분위기를 띠며 관객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이어진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에서는 조성진 특유의 부드러운 터치와 완급 조절이 곡의 우아함과 서정성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라벨 후기의 대작 ‘쿠프랭의 무덤’으로 무대는 마무리됐다. 이 곡은 1차 세계대전에서 세상을 떠난 라벨의 친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연가풍 춤곡 모음으로, 애도의 감정과 춤곡의 경쾌함이 교차한다. 조성진은 악장마다 적절한 감정선을 살리면서도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해 깊은 여운을 남겼다. 마지막 ‘토카타’ 악장에서는 힘차고 빠른 터치로 음악적 클라이맥스를 완성하며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번 공연은 단순히 기술적인 기교를 과시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3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조성진은 라벨 음악의 섬세함과 복합미를 전달하며 음악적 서사를 펼쳤다. 또한 청중도 피아니스트와 함께 긴 여정을 견디며 음악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체감했다. 이날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숨죽이며 집중했고, 무대 위 조성진에게 뜨거운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이처럼 조성진의 10년 경력은 혼자가 아닌 관객과 함께 만들어온 시간임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연주는 라벨 음악 세계의 깊이를 다시금 조명한 기념비적 무대였다. 특히 전곡 연주라는 희귀한 기획을 통해 라벨의 음악적 진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며, 조성진은 이를 통해 자신만의 해석과 감성을 더해 젊은 거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관객들은 라벨의 빛과 그림자, 격렬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세계에 흠뻑 빠져들며 음악 예술의 진수를 체험했다.